사야마 사건)이시카와 가즈오는 무죄인가? 법적 공방만 50년

Posted by Rain Wiz
2020. 2. 23. 16:40 세상이야기/사건들

일본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1963년 5월 1일 고등학교 1학년

나카타 요시에(中田善枝, 당시 16세)가

납치되어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한다.


경찰은 일본 내에서 천민 취급을 받는

부라쿠민 출신의 이시카와 가즈오(石川一雄)

24세를 용의자로 체포한다.


일본내에서는 부라쿠민 출신을 탄압하기 위해

그를 체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디까지 추측일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건 개요



1963년 5월 1일 나카타 요시에는 친구에서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라고 말하며

자전거를 타고 조기 하교하였고,

하교 이후 학교 근처 우체국에서 우표를 예약

오후 3시 20분 요시에가 학교로 가는 길과

전혀 다른 방향인 세이부 철도 가드레일쪽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오후 6시가 되도 딸이 집에 오지 않자

요시에의 오빠(25세)가 그녀를 찾아나서지만

찾지 못한채 오후 7시 30분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요시에의 오빠가 문 틈 사이에

편지 봉투를 발견, 봉투는 형박 편지였다.


내용은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내일 자정에

돈 20만엔을 내놓아라, 경찰과 이웃에게 알릴 경우

딸의 목숨은 없다'라고 적혀있었다.


7시 50분 호리가네 파출소에 신고하였고

파출소 측은 다시 사야마 경찰서에 연락하여

협조를 요청 긴급 수사 체제를 편성한다.



다음 날 요시에의 언니(23세)가 밤 11시 40분에

경찰과 함께 위조지폐 20만엔을 들고 협상 장소로 갔다.

협상 장소는 사노야 술집이었다. 안에는 이미 40명의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는데 어이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범인을 기다리던 언니가 경찰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그 모습을 범인이 눈치채고 도주해버린다.

이후 범인에게서 협박 편지나 전화는 일절 없었고

그녀는 5월 4일 오전 10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녀는 경부 압박에 의해 질식사 하였고

후두부에 둔기에 가격당한 상처가 발견되었고

배와 다리에 무언가에 의해 할퀸듯한 상처가 있었다.


또한 그녀는 죽기전에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듯

정액이 나왔는데 검출된 혈액형은 B형이었다.

저항 흔적은 없었지만 경찰은 그녀가 강제로 범해졌다 주장한다.


경찰의 수사 및 체포



협상 결렬 후 5월 3일 새벽 범인의 족적을 발견한다.

족적은 양돈장까지 이어졌는데 그 곳의 주인과 가족

종업원 모두 사야마 시 내의 부라쿠민들이었고,

요시에의 통학로였다고 한다.


이후 165명으로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였고

양돈장 사람들을 불러 심문하던 중 얼마 전

양돈장에서 삽이 분실됬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곳에 삽이있는 건 관계자 밖에 몰랐으며

도사견이 양돈장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 양돈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을 의심한다.


5월 11일 이루마가와의 밀밭에서 삽이 발견

5월 23일 양돈장 근처에 살던 부라쿠민

이시카와 가즈오를 긴급 체포한다.


당시 그를 이번 사건때문에 잡은 것은 아니고

상해 및 절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3개월 전까지 양돈장에서 머물며

일을 한적이 있다는 점, 양돈장 관계자 21명 중 

유일하게 B형의 혈액형이라는 것을 이유로

그를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하며 이 사건은

사건 발발 22일 만에 해결되는 것 처럼 보였다.


이시카와 가즈오의 혐의 인정 및 번복



강도 높은 심문을 하였으나 가즈오는 혐의를 부인,

그의 변호사의 보석 신청으로 6월 17일 풀려나게 되나

석방 직전 강도,살인,강간,사체유기 혐의로 그를 다시 체포.


6월 20일 자신과 총 3명이 요시에를 간음한 뒤

살해하였다고 자백하였고, 21일에는 요시에의 책가방이

매설된 곳의 약도까지 그려 알려준다. 그런데 6월 24일

그는 단독 범행이라며 진술을 번복하며 또 다른 유품인

피해자의 만년필,손목시계의 위치도 알려준다.

26일 만년필을 발견, 27일에는 손목시계를 발견한다.


7월 9일 우라와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1심 재판

그는 모두 인정하였고 6개월이 지난 1964년 3월 11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다음 날 가즈오는 항소한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그는 자신의 자백은 검찰의 강압수사에

의해 자백을 강요당한 것이며,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한다.

(위의 내용만 보면 가즈오는 요시에를 살해한 범인이 확실하지만)


이시카와 가즈오 그는 범인인가? 경찰 측의 주장



협박장의 글자가 실제와 맞지 않게 쓰였다.

일본 내에 부라쿠민은 문맹 비준이 높았고

과거 가즈오가 조퇴신청서를 쓸 때도 글자가 틀리는 등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문법적 실수가 잦다는 점.


가즈오가 협박장을 피해자 자택에 전달하러 갈 때

가마쿠라 가도에서 자동삼륜차에 추월당했다고

진술하였다. 경찰은 증인을 찾던 중 자동삼륜차를

봤다는 증인을 찾았으며 피해자 집 근처 농가에서

피해자의 집 위치를 물어봤다고 진술하였다.

그 농가로 찾아가서 물어보자 그 사람은 가즈오의

인상착의를 설명하였는데 정확하게 일치하였고,

또한 피해자 집 2,3개 동 인근 도로에 자동차가 정차해 있었다고

진술하였는데 실제로 피해자의 집 2동 근처에 비료상이

라이트 밴을 세워뒀다고 한다.



또한 몸값 전달을 위해 피해자의 언니와 함께

협상 장소로 갔던 사람이 범인의 목소리가

가즈오의 목소리와 완전히 일치하였다고 증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즈오가 처음에 주장한 5월 1일 17시경까지

형과 함께 일을 했다는 알리바이가 거짓이라는 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시카와 가즈오 그는 범인인가? 변호사 측의 주장



가즈오의 변호사는 손목시계,만년필,가방이 모두 날조라고 주장

먼저 피해자의 손목시계는 코니6형이지만 발견된

손목시계는 시티즌 배트였기에 전혀 다른 물건이라는 것


만년필의 안에 있던 잉크가 블루블랙인데 피해자가 당일 수업에서

필기할 때 사용한 것은 라이트블루였고, 가즈오의 자백 이전에

집을 수색했음에도 만년필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만년필을 발견한 것과 발견된 장소가 비교적 찾기 쉬운

부엌의 문틀에 있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협박장과 가즈오의 필적이 다르다는 점인데

국어학자 오노 스스무가 검찰 측에서 증거로 제출한 협박장에 대해

필적 및 문장이 가즈오의 낮은 일본어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분석을 도출 피고인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검찰과 변호사는 치열한 법정 공방전을 벌였고

1974년 10월 31일 이시카와 가즈오에게 무기징역이 확정된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를 가지고 온 변호인의 도움으로

1977년 재심 청구를 하지만 기각하며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1977년 9월 8일 치바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94년 12월 21일 31년 7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이시카와 가즈오는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무죄를 주장하며 아직까지 법적 투쟁을 계속중이지만

아직까지 그가 무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가 무죄라면 경찰의 잘못으로

가즈오는 억울하게 30년 넘게 감옥에 있었던 것이 되면서

엉뚱한 사람을 잡는 바람에 범인을 놓쳐버린 것이 된다.


가즈오가 범인이라면 살해당해야 마땅할 범인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도 모자라 무죄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기가막힌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법적 공방을 무려 50년이나

하고 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요시에의 언니는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다 사건 발생 몇 달 후 음독자살을 하였다고 한다.

(요시에씨와 그녀의 언니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일본 사건명:狭山事件 (さやまじけ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