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시카가 사건)독신남은 소아성애자? 경찰들의 개막장 과학수사

Posted by Rain Wiz
2019. 11. 6. 00:12 세상이야기/사건들

일본 1990년 5월 12일. 만 4세였던 여자아이가

행방불명이 된다. 그리고 다음날인 13일

근처에 있는 강가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사건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많은 제보가 온다.


일본 경찰은 시민들의 제보로 범인을 찾기 시작하는데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자 사건 발생 7개월 후인 12월 

프로파일링에 의한 범인상 추측 및

과학수사로 수사방향을 전환한다.


그러나 당시 도입한 프로파일링은 시작단계에

충분한 연구도 없어 문제점이 많았다.



먼저 일본 경찰은 '독신남 중에는 로리콘이 많다',

'생활패턴이 단조롭고,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이

이런 엽기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라는

근거도 없는 단순무식한 주장으로 수사를 시작.


현대에서 이러한 주장으로 수사를 했다가는

맞아 죽기 쉽상이지만, 당시는 어떻게 수사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골 때리는 수사에 억울하게 잡힌 사람은

스가야 도시카즈 라는 45세의 남성이었다.



이 남성은 원래 유치원 운전기사였는데

1991년 초 스가야의 근무지로 경찰이 조사를 나오게 되는데 

그 것이 원인이 되어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경찰은 1991년 12월 2일 

스가야 도시카즈를 별 다른 확증도 없는 상황에서 

외설목적유괴살인 혐의로 구속되었고,

1992년 부터 복역이 확정된다.


당연히 억울한 옥살이에 3심까지 항소하였으나

초기 단계에서 경찰 측 증거를 인정.

2000년 무기징역이 확정된다.


여기서 경찰 측이 내민 증거는 피해자의 의류품에서 

나온 체액과 스가야의 DNA가 일치했다는 것. 

하지만 스가야의 머리카락 같은 확실한 것이아닌,

스가야가 버린 쓰레기에 있던 휴지에 묻은 체액이었다.


게다가 DNA검사가 당시는 아직 시작단계였다.

전혀 다른 사람의 DNA로 검사해도 일치할 확률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증거로 제출하였고,

재판소가 인정하면서 스가야를 범인으로 확정하게 된다.



그러나 1999년 비슷한 종류의 사건에서 

DNA감정 실수로 부정확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라는

선례가 만들어 지며 다시 이 사건이 떠오른다.

사건 발생 17년이 지난 2008년 스가야는 

다시 DNA를 감식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최초 지방재판소에서는 기각하나,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인정 17년만에 DNA재감식을 실시한다.

감식결과 '일치 부분이 적기에 동일 인물의 DNA가

아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판정났고,

스가야 도시카즈는 17년만에 임시출소 형태로 출소.

다만 법적으로는 아직 죄인인 상태였다.



사건이 이 만큼 커지자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모리시타 아키오 형사부장이 자신은 규칙대로

수사를 진행했으며, 당시 자백도 받았다고 밝히며

아직도 진범은 스가야라는 글을 블로그에 작성한다.


이 글이 일본 네티즌에게 알려지면서

블로그가 테러당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사실 스가야가 자백한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그건 녹취록을 들어보면 강압적인

분위기에 스가야가 어쩔 수 없이

자백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피해자의 유가족들도 스가야 도시카즈가

진범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임시석방 후 최후공판인 2010년 3월 26일.

스가야 도시카즈는 17년만에 무죄판결을 받는다.

우즈노미야 지방검찰청장은 검찰을 대표하여

스가야씨에게 사과하였다.



사실 과거 일본에 이런 사건이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 사과 영상 또는 사과문을 보낼 뿐이었으나

이번 사건은 공개석상에서 허리를 굽히며

직설적으로 사과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이 사건의 여파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판결을 지켜본 피해자의 유가족은

무능한 경찰로 이 꼴이 났으니

당장 재수사를 하라며 분노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진범을 잡아도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처벌 할 수 없기에

너무나 씁쓸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스가야씨는 보상금으로 8,000만엔과 

재판비용 1,200만엔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가정은 이미 파탄나 있었다. 스가야 도시카즈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체포되자 그 충격에 심부전으로 사망.

아들의 무죄를 믿던 어머니는 석방 2년 전 노환으로 별세한다.

경찰의 개막장 수사가 한 가정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현재 스가야 도시카즈씨는 사회운동가로 활동중이다.

일본 사건명:足利事件(あしかがじけ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