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마카스 사건)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진범인가?

Posted by Rain Wiz
2019. 10. 8. 05:56 세상이야기/사건들

1923년 9월 16일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에 일어난 사건이다.

일본명:甘粕事件(大杉事件)


이 사건은 무정부주의자였던 오스기 사카에,

그리고 그의 내연녀였던 이토 노에의

실종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관동대지진에

의해 도쿄와 카나가와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관동대지진에 의해

부상을 입게 된 오스기의 여동생을 병문안 후

여동생의 아들이었던 6살 타치바나 소이치를

데리고 자신들의 집이있던 카나가와현으로

가던 중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들은

헌병들에게 끌려갔다는 목격담을 내놓았고,

신문사에서는 이 목격담을 근거로

일가족이 살해당했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군부와 갈등이 심했던 경시청에서도

기회다 싶어 군부를 압박하였고,

게다가 오스기의 조카였던 타치바나 소이치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에서도 일본 정부에 항의를 한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 놓인 군부는 오스기 일가가

헌병대에게 살해당했으며, 살해범은 헌병대의 대위였던

아마카스 마사히코라고 밝히게 된다.

그리고 세 사람의 시신이 오래된 우물에서 발견.



군법회의에서 민간인 살해혐의로 아마카스 대위는

직속 상관이었던 헌병 사령관 고이즈미 류이치에 의해

정직 처분을 받게 되었고, 

계엄 사령관 후쿠다 마시타로에 의해서 경질되었다.



9월 24일에는 군법회의 재판정에서는 사건의 전모가

들어나게 된다. 아마카스 대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관동대지진의 틈을 노려 정부를 전복하려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의 중심이었던 

오스기와 이토의 살해를 결심. 집으로 돌아가던

오스기 일가를 아마카스 대위 자신과 헌병대 특별

고등경찰과에 있던 모리 케이지 상사가 그들을 납치.

헌병대로 끌고와 당일 세 명중 한 명을 살해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의 진술은 명확하지 않았다.

오스기의 조카 살해에 대해서도 '아이는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했다가,

갑자기 독단적으로 세 명 모두 죽였다고 하는 등

확실하게 말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배후에

상층부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군법회의에서는 아마카스 대위에게 징역 10년,

모리 상사에게 징역 3년형을 판결내렸지만

그들과 같이 오스기 일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아마카스 직속 부하 3명에겐 무죄판결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무정부주의자들이 분노.

보복으로 군 간부들을 향한 암살을 벌였으나

실패를 하고 게다가 잇달아 체포까지 되버리는 바람에

무정부주의 세력은 미약해져버린다.



그리고 아마카스 대위는 형량을 받던 중 

절반도 채우지 않은 채 석방되었고 육군성의 지원으로

프랑스로 유학 뒤 만주로 가서 만주국에 관여한다.

그리고 2차 대전으로 일본이 패하자 

1945년 8월 20일 자살한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유력한 설로 배후에 상층부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게 가장 유력하다. 형기를 절반도 채우지

않은채 나오며, 유학까지 보내준 것이

이 설을 뒷 받침해 준다.


심지어 프랑스 유학 뒤 가게 된 만주에서 

아마카스가 '내가 죽이지 않았다'라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이 인간은 똘끼가 상당했던 인물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의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사건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아마카스 마사히코라는 것.

그러나 그는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진범이 따로 있어도,

기록에는 영원히 범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