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 일제 코흐(Ilse Koch)

Posted by Rain Wiz
2020. 3. 9. 06:21 일상생활 도움정보/공부

나치와 제 2차 세계 대전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부헨발트 수용소 및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수용소장을 하고 있었던 카를 오토 코흐의

아내인 일제 코흐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녀는 슈츠슈타펠의 여성보조원 및

여간수로 지냈으며 그 곳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그로인해

'부헨발트의 붉은 마녀'라는 이명이 붙는다.



그녀는 드레스덴 출신으로 아버지는 농부였다.

초등학교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다고 한다.

가난한 집 사정으로 15살에 공장에 취업한 뒤

이 후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다 나치즘에 흥미를 가졌고 SA대원들과

친하게 지내던 중 나치에 가입하게 된다.


1936년 베를린 오라니엔부르크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비서 및 경비원으로 일하다 1937년 수용소장

칼 오토 코흐와 결혼하면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때부터 남녀 모두에게 성적 학대를 가하기 시작한다.



일제 코흐는 승마용 채찍으로 자신이 지칠 때까지

때리는가 하면 사육하던 맹견을 여죄수에게 던져주거나

섹스 파티 등 별의별 만행을 저질렀고

이로 인해 성불구가 된 수감자도 많았다.



그러던 중 친위대 위생학 연구장교 발테마르 호벤에게

해부 기술을 전수 받게 되고, 이 기술로 수감자의 장기를

해부하거나 시체 살조각으로 전등을 만드는가 하면

피부를 벗겨낸 후 책 덮개,장갑 등을 만들었고

문신을 한 사람이 있으면 독극물 주사로 살해한 뒤

문신 피부를 벗겨내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게다가 가족이 사용하는 저녁 식탁을 두개골로

장식하는 등 잔학함과 음란함이 유명해지면서

부겐발트의 마녀,암캐라고 불리게 된다.



일제 코흐는 1938년 첫 아이 아르트빈 코흐를 출산

이듬해 두 번째 아이 기슐라를 출산하나 사망,

1940년 세 번째 아이 아이인 구드룬도도 1941년

사망하게 되자 수감자들을 더욱 괴롭히게 된다.


채찍에 면도날을 박아 임산부를 유산시켰고,

여자 수감자를 알몸으로 남자 수감자들이 있는

방에 집어 넣어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다고 한다.

(임산부는 유산이 되자 슬퍼하다 자살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는 수감자들에게 횡령한(유품) 25만 마르크로

실내 스포츠장을 건설,1941년에는 최고 여성감독관으로

임명받게 되며 여간수들을 통괄하는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1943년 일제 코흐는 남편과 같이

횡령 및 기타 죄목으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1944년 말~1945년까지 바이마르에 투옥

1945년 초 남편 카를 오토 코흐가 나치 친위대 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되며 4월 처형되었으나 일제 코흐는 석방된다.

이 후 그녀는 루드비스부르그 친정에서 살다

1945년 6월 30일 미군에게 체포당한다.



1947년 일제 코흐는 종신형을 선고받으나

증거불층분을 이유로 1951년(4년)에 석방된다.

그러나 많은 피해자들의 탄원으로

독일 법정에 서게 된다.


일제 코흐는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며

국제인권위원회의 고발위원에게도 대드는 등

반성의 기미도 안보였고, 결국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60세가 되던 1967년 9월 1일

아이샤흐 여자 형무소에서 침대시트로 목을 메어

자살하게 된다. 그녀가 자살하기 전 자식이 면회를 왔는데

그 때 "죽음만이 구원이다"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