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를 평정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 '고려의 건국편'

Posted by Rain Wiz
2019. 9. 10. 06:57 일상생활 도움정보/공부

왕건 877년~943년 송악에서 왕륭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집안은 고구려 유민계로 보이며, 아버지 왕륭은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누린

대호족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왕건은 어릴 적부터 훤칠한 용모와 총명함, 

그리고 대장부의 기상을 두르 갖추고 있었다고 하며, 

17살이 된 왕건에게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대사가 

찾아와 그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등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혼란한 시기를 틈타 궁예가 거병하자, 

아버지인 왕릉과 함께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서 장수로 활약하게 된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의하면 왕건은 898년

정기대감에 임명되고 양주와 견주를 공격한다.

하지만 기록상에 승리를 하였다 같은 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왕건의 첫 전투는

별 다른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2년 뒤 900년에는 광주,충주,청주 등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아찬 벼슬을 받게된다.



(나주에서 만난 왕건과 장화왕후)


그러나 이제 더 강한 적과 부딫히게 되는데

왕건의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후백제의 견훤이다.



당시 백제의 후방에 속하는 금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현재는 나주라고 불리고 있는 곳인데, 백제가 중국과

외교,교역를 하기 위해서 중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왕건은 이 금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913년 공로를 인정받아, 시중의 자리까지 

앉게 되어 명실상부한 2인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어느새 자신의 군주인 궁예가 폭정을

시작하여 많은 신하들이 죽어나가면서

왕건 자신도 언제 죽게 될 지 모르는 운명이 된다.


심지어 궁예는 왕건에게 "역모를 모의하였다"라고 하였고,

왕건이 부정, 궁예는 "신통력으로 보아서 안다"며

왕건을 다그쳤다. 왕건을 아끼던 최응이라는 사람은

붓을 떨어트린 척 하며 왕건에게 다가가 

"인정하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말을 하였고,

왕건이 이 이야기를 듣고, 역모를 하였다고 인정하자

궁예는 정직하다며 금은보화를 주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왕건이지만 역모를 인정하였으니,

언제 다시 이 일로 트집 잡혀 죽을지 모르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궁예의 폭정을 참지 못한 

신숭겸,복지겸,배현경,홍유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하지만 왕건은 "나는 충의로 삼고 있다, 왕의 폭정이

심하더라도, 어찌 두 마음을 품겠소"라고 하였지만

그에게 온 장수들은 천명임을 강조하였고,

그의 아내인 신혜왕후 류씨의 설득에 군사들을

이끌고 왕성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궁예는 계속된 폭정으로 주위의 충신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왕건의 반역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다 결국 궁을 버리고 도피.

보리를 훔쳐먹다 백성들에게 돌을 맞아 죽게 된다. 


결국 왕건의 혁명은 성공하여 918년 왕으로 즉위.

고구려를 잇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고려라 하였고,

천수라는 연호를 정하게 된다.


왕의 자리에 앉게 된 왕건은 이제 숙명의 라이벌인

백제의 견훤왕과 삼국통일을 자웅을 겨루게 되는데...

 

후삼국 시대를 평정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 '고려의 통일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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