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집념의 사나이 '요시다 이시마츠'의 암굴왕 사건!

Posted by Rain Wiz
2018. 2. 23. 12:17 세상이야기/사건들

1915년 8월 13일 나고야에서 소매업을 하던

중년의 남성이 두 명의 남성에게 살해당하고,

1엔 20전을 빼앗긴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범인들은 다음날 잡히게 되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체포된 두 명의 범인은 자신들의 형을 가볍게 하기 위해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요시다 이시마츠'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요시다를 체포한다.

억울하게 체포된 요시다는 경찰에게 사실대로 말하였지만
경찰은 진범 2명의 이야기만 믿었고,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요시다는 주범이 되었고,
진범 2명은 종범으로 기소되었다.

 

결국 요시다에게 사형
진범 2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요시다는 두 번이나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당했다.

 

그렇게 '코스게 형무소'에 수감되게 되었지만
형무소 안에서도 요시다는 무죄를 부르짖었다.

 

계속된 요시다의 주장을 고깝게 여겨 고문을 가하기도 했지만
요시다는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계속된 무죄 주장에 귀찮아졌는지
요시다를 '아바시리 형무소'로 이감시켰다.

그런데 여기서도 요시다의 무죄 주장에 넌더리가 났는지
이번에는 '아키타 형무소'로 이감시켜버린다.

 

하지만 다행히 아키타 형무소로 간 것이
누명을 벗을 절호의 찬스가 된다.

 

계속된 요시다의 무죄 주장에
아키타 형무소 소장은 의구심이 들었고,

자체적으로 사건을 재조사하였다.


재조사한 결과 요시다가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결국 아키타 형무소 소장의 도움으로
요시다는 1935년 가석방되었다.

 

그 후 대법원 출입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누명을 씌운 두 명의 범인이 살고 있는 위치를 알아냈고,

그들을 찾아가 누명을 씌운 것을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1년 동안의 끈질긴 요구에 그들은 사실을 인정하고

요시다에게 사과문을 적어 줬고,
이를 증거로 법원에 세 번째 재심 청구를 했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이번에도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웬만한 사람이면 세상을 저주하고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의 멘탈은 거의 금강석 수준인 듯...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피난을 간
토치기현에서도 자신의 무죄를 외치며 호소했다.

 

그 후 1952년 다시 언론과 변호사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호소
1958년에는 법무장관과의 면담까지 요구한다.

법무장관과의 면담은 거절당했지만,

이때 요시다와 대화한 법무부 직원이
요시다의 주장에 일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보인다며

그를 일본 변호사 협회 인권옹호부 사무실로 안내해줬고,
그곳에서는 요시다를 돕기로 한다.

 

 

일본 변호사 협회 인권옹호부와 몇 명의 증언에 의해
여론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하고

 

1960년에 다시 한 번 재심 청구를 진행하였고,
나고야 고등법원 제4부 재판관들이 이를 인정해 재심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검찰 측에서 당시의 현행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재심 청구는 부당하다는 이의를 제기

나고야 고등법원 제5부 재판관들은 재심 청구를 기각한다.

 

 

이에 일본 변호사 협회는 특별상고하여
재심 청구는 일본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된다.

 

1962년 일본 대법원이 '요시다 사건'은
당시의 형사소송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며,

고등법원의 결정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건을 나고야 고등법원으로 되돌려보내

겨우 재심이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1963년 2월 28일 나고야 고등법원
제4부 재판관들은 요시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무려 50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고,
요시다는 기쁨에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 후 부당하게 구금되있었던
요시다에게 315만 5600엔의 보상금이 지급되지만

오랜 집념이 이뤄진 탓일까...
그 후 기력이 쇠해 9개월 후 그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

 

#실적에 눈이 멀었는지 아니면 그냥 멍청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경찰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고달프게 된 사건 입니다.